[무아 씀 긁어오기] 미인
2021년 어느 글방에 참여하여 썼던 글이다. (3/5)
“팔에 털이 많으면 미인이랬어.” 라고 엄마가 그러셨다.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 팔을 쓰다듬으면서. 내 팔에 털이 나 있다는 걸 내가 인지하고 있는 시점부터 엄마는 줄곧 그렇게 말해왔다. 털이 뭐가 이쁜거지? TV에 나오는 여자들도 팔에 털이 있던가? 내 친구는 있던가? 여자 몸에 나는 털 중에 매력이 되는 건 머리털, 눈썹, 속눈썹 정도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스무살에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귈 때는 겨드랑이나 다리 말고도 늘 팔이 신경 쓰였다. 여름엔 팔을 어떻게 가릴 수도 없고, 제모를 하자니 너무 자주 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탈색이었다. 거의 투명 하게 만들어서 털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인중이나 팔 전용으로 나온 탈색크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그 때는 그런 제품이 있는 게 고마웠다. 그런데 팔의 털도 자라 는 놈이라 시간이 지나면 뿌리 염색 하듯이 또 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 크림을 바르고 있으면 너무 나도 따가웠는데, 그걸 다 감수하고도 몇 통을 다 비워버릴 때까지 탈색을 참 꾸준히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커피숍에서 알바를 하다가 탈색 된 내 팔의 털이 햇빛에 노랗게 반짝이는 걸 봐버렸 다. 뭐 탈색된 털이 햇빛에 좀 반짝여 보일 수도 있는데, 순간 그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절대 감 춰질 수가 없는 걸 억지로 감춰 놓았다가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바비 인형의 머 리털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감촉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기분도 좋았다. 부드러운 걸 만지면 대게 기분이 좋아지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팔 에 털이 있는 게 나쁘지 않다고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그렇지만, 그 때만 해도 크림이 조금 남아 있던 때여서 뿌리가 조금 자랄 때 한 번 더 탈색을 했다. 그리고 그만뒀다. 그 후로 검게 자란 팔의 털을 보고 남자친구가 무슨 생각을 할까 조금 걱정도 됐지 만, 걔가 무슨 생각을 하던 말던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결론이 내려지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문제는, 나는 아직도 팔털의 존재만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겨드랑이나 다리털은 신경이 쓰여서 주기적으로 제모를 하고 있다. 엄마가 겨드랑이나 다리털은 미인이라고 해주지 않아서인지, 아 니면 이 부위의 털들은 만져도 별로 부드럽지가 않아서인지. 아니면 TV에 깨끗하게 제모한 여성만 나 와서인지. 내가 그런 여성만 선택적으로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이 부위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 다. 나는 한여름에도 민소매와 반바지는 입지 않으므로 햇빛에 털들이 반짝이는 장면을 목도할 경우의 수도 적다. 그러니까 팔의 경우처럼 그런 식의 깨달음이 올 일도 없다는 뜻이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손 위로 뻗은 두 팔에는 탈색되지 않은 고유한 털이 있다. 어떤 건 조금 짧고 어떤 건 유독 길다. 진한 부분도 있고 연한 부분도 있다. 굵기는 끝으로 갈수록 얇아져 있 다. 지금은 이렇게 쳐다보고 있어도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할 생각도 전혀 들 지 않는다. 사실 나는 ‘털’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도 조금 꺼려하지만, 팔털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 은 지금처럼, 내 몸의 모든 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순간을 기다린다. 되도록 빨리 왔으면 좋겠다.
- 무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