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씀 긁어오기] 최초의 수치심과 죄책감
2021년 어느 글방에 참여하여 썼던 글이다. (5/5)
최초의 수치심
이 기억이 내 최초의 수치심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첫 수치심일 것이다. 때는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이니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일 것이다. 장소는 유치원에서 단체로 갔던 수영장 탈의실이다. 당시 나는 생애 최초로 수영복을 혼자서 입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가기 전에 엄마가 수영복은 어떻게 입는 건지 설명도 해주고 입는 연습도 했던 것 같은데 이 기억은 별로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기억은 그 수영장 탈의실에서 내가 했던 어떤 고뇌다. 고뇌 끝에 입은 수영복 위에 잠바를 걸친 후 꼼꼼히 잠근 다음 선생님께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 못 입은 것 같았기 때문에 확인 받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선생님의 뒤편으로 가 ‘선생님...’ 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불렀다. 선생님이 뒤를 돌아봤다. 아마 수영복을 다 입었냐고 물어보셨을 거다. 왜 겉 옷을 걸치고 있냐는 질문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배배 꼬았더니, 그녀는 기어코 내 앞에 쭈그리 고 앉아 겉옷을 벗기려고 하셨다. 그 손길을 우물쭈물 쳐냈더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를 달래며 더 가 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내 겉옷을 살짝 바깥으로 당기곤 옷 속을 흘끔 쳐다봤다. 옷 속엔 앞뒤를 바꿔 입어 배 한 가운데가 둥그렇게 뚫려있는 수영복이 있었다. 나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옷 속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큭’ 하고 터진 웃음을 참으려 고 애쓰는 얼그러진 얼굴을 보자 나는 극도로 수치스러워졌다. 그 뒤에 그녀가 내 수영복을 다시 갈아입혔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수영을 하러 갔어야 하 니까 갈아 입혀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그녀의 ‘큭’ 하는 웃음소리, 나를 민 망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 그걸 떠올리면 그 즉시 수영복의 앞뒤를 치 열하게 고민하던 7살 즈음의 내가 조금 안쓰러워진다. 그래도 더 이상 이 기억이 지금의 나를 수치스럽 게 만들지는 않는다.
최초의 죄책감
이 경험도 확실히 최초의 죄책감은 분명 아닐 것이며, 아마 첫 번째 기억도 아닐 것 같지만 구색을 맞 춰 보고자 최초라고 해야겠다. 때는 초등학교 3학년, 윤선생 교재를 붙들고 다음 날 아침에 있을 모닝 콜을 대비하던 어느 날 밤이다. 장소는 엄마가 있던 안방. 교재를 엄마에게 내밀고 외운 문장들을 읊었 다. 대충 이런 문장이었을 거다. ‘Where have you been?’ ‘Where’와 ‘have’의 발음에 특히 신경 쓰 면서 읽었을 것이다. 윤선생은 발음을 중요시 했으니까. 잘 외우다가 중간에 막혀서 눈동자를 몇 번 굴렸더니 엄마는 서툰 발음으로 내가 다음으로 외워야 할 문장을 읽었다. 나는 순간 놀란 눈을 하고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안경을 고쳐 쓰며, ‘왜, 엄마가 영 어 못 읽을 줄 알았나.’ 라고 했다. 나는 놀란 적 없었던 척,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몇 번 더 영어 문장을 읽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냥 계속 다음 문장을 외웠다. 엄마도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듣기만 했다. 엄마가 더듬더듬 영어를 읽던 목소리와 속마음을 들켜 당황한 내가 또렷이 떠오른다. 가끔 이 기억이 떠오르면 속으로는 몇 번이고 엄마에게 사과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미안해 엄마. 이 기억은 지금도 나를 많이 부끄럽게 하고 미안하게 만든다.
202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