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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곳

나는 대구, 대전, 서울, 경기도…를 거쳐서 지금 제주도에 와 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제주도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살러 온 것은 아니고(그랬으면 좋겠다) 잠깐 여행을 온 것이다. 앞의 도시들은 길게는 18년, 짧게는 1년 좀 넘게 산 곳들로, 고향인 대구를 제외하면 살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도시들이다. 삶에서 주어지는 우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된 것일 뿐이다(아니지, 태어난 곳이 제일 우연이겠다). 이런 우연은 당시에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재밌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사는 일은 나를 갑자기 영화 속 장면으로 던져놓는 기분이 든다.

나는 옮겨 사는 것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새로운 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든다.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한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아빠의 직장이 원래 살던 곳에서 좀 멀어지면서 이사를 단행하게 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때 전학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엄마가 그것을 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실은 그냥 전학이라는 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아빠의 직장 문제와 나도 몰랐던 내 문제로 인해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토록 원했던 전학생이 되었다. 살면서 전학생을 보기만 했지, 직접 되어본 적은 없어서 설레기까지 했다. 그래도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전학 절차를 다 마쳤던 터라, 아침 조회 시간에 교탁 앞에 서서 어색하게 나를 소개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전학생인 사실이 좋아도 그것만큼은 잘 해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다행인 일이었다.

나의 두번 째 도시 대전은 대학교 때문에 살게 됐다. 사실 대구와 부산에 있는 대학에도 원서를 냈지만, 대전에 있는 학교에만 붙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지금 와서는 고향에 있는 학교에 붙지 않은 것을 좀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지 않았으면 영영 독립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안락한 고향집을 벗어나는 건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가거나 취업을 하거나 결혼을 하는 이벤트가 아니고서야 경제적인 측면에서 여간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어난 곳이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언제나 전학생이길 바라던 마음이 있던 나로서는 계속 한 도시에 사는 것이 체질에 좀 안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온 것이, 그것도 전까지는 살게 될 거라고 짐작도 해보지 않은 곳으로 살러 간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대전에서는 비록 학교 근처의 동네에만 머물렀지만 살기에 꽤 괜찮은 곳이었다. 대전이 좋았던 건, 학교라는 보호막이 주는 안전함 때문이기도 했고, 원 가족과 적당히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 학교 기숙사로 가던 날 아침,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일로 엄마와 말다툼을 하고 냉랭한 채로 달리던 차 안에서 살짝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부터는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어떤 감정적 타격을 받은 걸까 싶고. 그래도 원하면 언제든지 대구로 갈 마음을 먹기에 충분히 가까운 거리라서 첫 독립으로 아주 괜찮은 도시였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도시 서울은 직장 때문에 올라가게 됐다(북진하는 삶). 졸업 무렵에 우연히 얻은 면접 기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서울에 있는 회사였다. 사실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대전에 있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 뭐, 면접에 붙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일단 가보기나 하자고 갔다가 덜컥 붙어서 결국 서울에 살게 된다. 그땐 인턴이라 3개월이 지나면 다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단기로 집을 구했다. 집을 자주 비우는 분이 주인으로 있는 아파트의 하우스메이트로 들어갔는데, 3개월 후에 정직원으로 전환되면서 그 집에서 더 지내기로 했다. 사회 초년생 치고 아주 쾌적하고 좋은 집에 머물렀다. 1년 정도를 그 집에 산 후에 주인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네의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방 세 개 아파트에 살다가 갑자기 5평짜리 원룸에 살게 되니 답답했지만, 그래도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감각이 참 좋았다. 대학에 다닐 때도 자취를 했으니 처음 느껴보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다가 독립한 기분이랄지. 엄마는 내가 살던 동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 같은 20대 1인 가구가 많이 살던 동네였는데 그전의 아파트 촌과 다르게 후미지고 어두운 골목에 내가 살던 건물이 있었다. 나는 계속 거기 살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엄마가 내 동네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래도 내가 정붙이고 살아야 하는 곳이니 가능한 그 동네에서 눈에 띄는 것들은 좋아하려고 애썼다. 우리 집 앞에는 매일 가도 안 질리는 예쁜 카페도 있고, 아주 조금만, 20분만 걸으면 나오는 멋진 호수공원과 바나나푸딩이 맛있는 아늑한 카페가 있는 동네라고. 그리고 그 카페의 사장님과 인테리어가 얼마나 사람을 잡아 끄는지 엄마는 몰라.

그렇게 몇 개의 원룸을 더 지나쳤고(그 사이에는 방과 주방이 미닫이문으로 분리된 집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경험도 있다) 바나나푸딩이 맛있던 카페도 문을 닫던 시점에 왜인지 나는 경기도의 어느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도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곳이다. 뜻밖의 지역에 사는 경험은 여전히 재미있다. 앞으로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더 하게 될까. 나도 모르게 정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과연 정착이 맞을까. 몇 년을 살면 정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향보다는 오래 살아야, 그러니까 한 18년 이상 살아야 정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그냥 태어난 곳, 학교, 직장 때문에 사는 곳을 선택해왔는데 내가 진짜로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직업이 나를 사는 곳으로 이끌었다면 과연 내가 살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하고 직업을 구하는 건 어떤 경험일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향의 선택이지만, 언젠가 한 번은 해봐야 할 선택 아닐까? 내가 지금 누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이 경험을 먼저 하신 분이 있다면 직업 때문에 사는 곳을 정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저한테 귀띔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글은 제주에서 쓰기 시작해 다시 내가 사는 동네의 카페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여행지에서의 들뜬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면 지금은 약간 꿈에서 깬 사람처럼 현실감각을 더듬거리면서 쓰고 있다. 만약 계속 제주도에서 글을 썼다면,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제주도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지가 사는 곳이 되면 더 이상 여행지 같은 낯섦은 없겠지. 이건 꽤 익숙한 딜레마다. 남은 연휴는 이 동네를 여행지처럼 낯설게 둘러볼 작정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낯섦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전학생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 말이다.

      1. ~ 2025. 10. 09.

2025년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을 옮겨왔다.

#daily #essay